
꽃다발
서다래 @wb_sdr0109
0.
평일 오후 5시, 학교 도서관 제일 안쪽 책꽂이. 조용한 이곳에서 우리는 약속을 하나 했다. 거창한 의미가 담긴… 그런 건 아니다. 나의 충동적인 욕심과 A의 무심함의 결과였다. 나는 매일 5시에 도서관에 가서 구석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건 A였다. 보자마자 하는 건 인사나 안부를 건네는 게 아닌 포옹이었다. 그 다음은 키스. 서로에게 익숙해진 건지 점점 키스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숨쉬기도 편해졌고 약간의 도발을 통한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것도 재미였다. 키스가 끝나면 대충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먼저 와 있던 A가 먼저 그 자리를 떠난다. 우린 매일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 두 가지를 하고 헤어지는 걸 반복한다.
1.
나는 A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 외에는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은 키스를 하던 도중, A의 흐릿한 눈을 보며 호기심에 말을 꺼냈다. “이름이 뭐야.”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이런 관계에 서로 아는 것이 없는 게 이상했고, 이 약속을 했을 때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말라는 내용은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A의 흐릿한 눈은 꽤 길게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 뜨더니 옆에 둔 안경을 쓰며 대답했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꽤 단호한 답이었고, A는 그대로 미련 없이 나가버렸다. 나는 그 대답을 들은 후로 A에 대한 모든 호기심을 억눌렀다. 한 번 거부당한 걸로 충분했다.
2.
안정적으로 완벽한 가을이 됐을 무렵, A는 오랜만에 말을 꺼냈다. “입시는 잘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이 기분 나빴던 건지 A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나는 계속 웃으며 A를 품에 안았다. “내가 괜찮아서 계속 여기 오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A의 이런 사소한 걱정이 너무 달콤했다. 나는 더욱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이 약하게 힘을 주며 A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고, A는 그저 가만히 안겨있을 뿐이었다.
3.
A의 걱정과 달리 입시는 매우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입시를 끝낸 후의 만남은 내게 있어서 불안의 연속이었다. 나의 졸업이 내 발목을 잡는 탓에 A를 만나는 약속이 더욱 간절해졌다. 하루는 평소처럼 다 하고 갈 준비를 하는 A와 더욱 오래 있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A의 검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입 안에 넣었다가 내 입술에 부비며 삼켰다. 발끝부터 묵직한 느낌이 나를 옭아맸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 조급하게 품 안에 가두고 격하게 원했다. A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건지 내 팔을 부담스럽지 않게 밀다가 끝내 주먹으로 쳤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고 A의 입술을 바라봤다. 또 다시 밝게 붉어지는 입술에, 감정이 더욱 강렬해졌다. 입술에 뒀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마주한 시선 속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선명한 눈빛이 보였다. 내가 알던 A는 키스를 한 후에는… 한 번도 올곧게 나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뭔가 실수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A가 가버린 후였다.
4.
그 날 이후엔 차마 도서관에 갈 수가 없었다. A를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내게 용기를 주진 않았다. 사과 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했지만, 혹시 내가 가도 A가 안 오면 그 아이에게 사과할 방법이 없으니…. 그 다음으로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A를 방패삼아 내 잘못을 직면하고 사과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5.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무심히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졸업식 전날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수업이 모두 끝나자마자 형식상 가지고 다닌 가방을 매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매일 보던 그 구석에 A는 없었다. 아직 5시가 안 돼서 안 온 거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계속 기다렸다.
핸드폰을 보니 6시가 다 되어갔다. 끈질기게 버티던 희망은 조금씩 짓눌렸다.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생겨났지만 그게 A를 향한 원망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A는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6.
형식상 3학년의 졸업식에 1, 2학년 참여는 필수였다. 졸업식 내내 신경은 계속 뒤쪽으로 쏠려있었다.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 위에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르내릴 때 계속 좌석 쪽을 빠르게 훑었다. 저 많은 인원 사이에서 쉽게 찾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교가를 부르며 마무리 단계까지 왔는데도 못 찾으니 비로소 후회와 자책이 한 번에 몰려왔다. 바로 다음 날에 사과하러 갔어야 했는데. 욕심이 앞선 나의 무례함으로 불쾌했을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어야 했는데.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들고 있던 졸업식 팸플릿이 구겨졌다. A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덧 졸업식은 끝났다. 부모님께 받은 꽃다발과 10대의 마지막을 간직할 친구들과의 소중한 사진. 들뜬 열기로 가득한 그 공간에서 나는 어떤 표정으로 그들을 마주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제대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꽃다발을 꽉 쥔 채 익숙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핸드폰을 보니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하나 와있을 뿐이었다. 나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고 빠져나온 걸까. 어느새 복도 중간에 멈춰있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끓어오르는 심장에 경보로 걷던 다리는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문을 요란하게 열어젖히고 익숙한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보는 A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 길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A를 바라봤다. 가뜩이나 막히던 숨이 더욱 막혔다. 책에 고정 되어있던 A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꽃다발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계속 후회하고 고대하던 사과를 해야 하는데. 입을 벙긋거리며 얼른 뭐라도 말해야 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A는 읽던 책을 옆에 두고 내게 다가왔다. 그 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선배.” A는 떨던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또 다시 A를 바라봤다. 정신없는 나와는 달리 A는 평온했다. 끓어오르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조잡한 사과를 내뱉었다. 이런 말밖에 못 하는 내가 싫었지만 이미 내게 주어진 발언 시간은 끝이 났다. A의 시선이 느껴져서 더욱 고개를 숙였다. “선배, 저는 그날 선배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싫지 않았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A를 바라봤다. A는 뭔가 후련한 것 같았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때 처음으로 A의 웃는 얼굴을 봤다. 숨이 턱 막혔다. A는 한쪽에 둔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꽃다발을 꺼내들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못 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졸업 축하드려요.” 끝내 원치 않던 종착지에 도착했다. A는 내게 꽃다발을 건네며 가벼운 목례를 했다. 나는 그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A는 용건이 다 끝난 듯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났다. 나는 A가 간 이후로 멍하니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내 두 손에 들린 두 개의 꽃다발은 처음과 달리 구겨져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