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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는 사양하겠습니다

한윤호  @Han_Y0U

“이번 무도회에서 나의 파트너가 되어주겠나?”

"아, 아니요. ……읏."

내가 사랑하는 얼굴을 내게 가까이 들이민 폐하는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귀를 간질이는 그 감각이 어쩐지 자극적이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얼굴은 필시 붉어졌을 것이다. 거절하는 데에도 몸이 들떠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치 감각 따위 없는 나도 황제의 첫 무도회 파트너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 파트너와 결혼하겠다는 선언 아닌가. 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폐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게 나가야 해, 아니면 넘어갈지도 몰라.

"그대 말고 내 파트너에 어울리는 이가 있을 거라 생각해?"

"혼자 가셔도 흉보는 사람은 없을걸요?"

"나는 그대를 홀로 외로이 둘 생각은 없는걸. 그대가 외로워할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미어지는군."

"저번에 저 혼자 잘 논다고 칭찬해주셨으면서. 어, 칭찬해 주신 거 맞죠?"

"……계속 고집부릴 건가?”

"저, 저, 저는 아직 폐하랑 결혼할 생각 없다니까요!”

내 말에 폐하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럼 기다려주도록 하지, 나는 그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얼굴 앞에 제대로 된 반박도 못 한 채 입을 다물었다.

 

소설 안의 여주인공에 빙의한 지는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소설의 이야기가 완결이 나고, 외전의 이야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원래는 역하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는데 내가 메인 남주의 쌍둥이 여동생인 공주님만 따라다니다 보니 스토리가 바뀌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왕권싸움에서 물러나 공작이 되었을 나의 폐하는 황제가 되었고, 왕관을 쓴 채 나에게 청혼했다. 원래대로라면 메인 남주가 주인공인 내게 청혼을 할 즈음의 시간이었다. 어쩌다 장르가 GL로 바뀐 거지?

 

나는 폐하가 나에게 청혼한 그 날의 밤을 떠올렸다. 달빛이 좋았던 밤이었다. 메인 남주의 얼굴은 이 세계의 미모 서열 0위였고, 그와 일란성 쌍둥이인 라일란 폐하의 미모도 당연히 서열 0위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반쯤 감동에 젖어 말했다.

'허억……, 폐하 얼굴이 저 달보다 눈부셔요. 아앗! 아앗!'

정말로 눈이 부신 척 손으로 가리면서 까르르 웃으니 폐하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는 평소와 다른 그 미소에 오두방정 떨던 몸을 얌전히 했다.

'네가 나를 볼 때 어떤 눈빛인지 아나?'

'네? 죄, 죄송합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워낙에 날뛰는 성격이라 가끔 폐하가 내 텐션을 따라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폐하는 내게 진정 좀 하라고 따끔히 혼을 냈다. 폐하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그 미소에 넋을 놓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폐하가 너무 좋았다. 가끔은 가슴속이 설레왔다. 나는 폐하를 사랑했다, 너무나 깊이.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폐하가 내 반응이 우스운 듯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내게 천천히 다가와 눈을 마주했다.

"그 누구도 그대보다 숭배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는 이가 없지."

"……하하, 그래요?"

"그 누구도 그대보다 내게 애틋한 이는 없어."

"……어, 그건."

엄청 로맨틱한 대사네요, 날 가져요 엉엉. 그따위 드립이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던 이유는 폐하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가 내 이마에 그 고운 이마를 대었다. 폐하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폐하의 얼굴을 가까이하며 내게 속삭였다.

"나와 결혼해주겠나? 김영희."

"……어어어……?"

폐하가 뭘 그리 놀라냐는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폐하의 청혼을 (감동해서 울먹였던 거로 기억하지만) 열심히 거절했다. 나도 폐하가 좋았다. 그렇지만 나는 폐하를 절대 나 같은 똥차에게 시집보낼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폐하에겐, 이 세상이 정해준 짝이 있었으니까.

원작대로라면 폐하의 남편이 될 엘리엇은 이곳에서만 존재하는 환상 속의 남자였다. 여성의 환상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다비드상이라고 해야 할까. 똥도 안 싸고 방귀도 안 뀌고 바람 같은 건 꿈도 안 꾸고, 정말 미모와 폐하에 대한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솜사탕 같은 남자였다. (아마 똥 대신 솜사탕을 쌀 지도 모른다.) 원작대로라면 곧 라일란 폐하가 그 다비드상이랑 썸타고 결혼해 행복하게 살 텐데, 그걸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대, 그래도 얼굴이 붉어.”

폐하가 키득거렸다. 나는 볼을 감싼 채 폐하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후우, 숨을 토해냈다. 저 얼굴 앞에서만 서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폐하는 내가 그에게만 약한 걸 너무 잘 알았다. 사실은 라일란 폐하만이 내게 특별하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유혹적인 태도에 온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흔들린다는 것도, 그의 다정한 한마디로 나를 완전히 녹여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 청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나는 내게 나른히 한걸음 다가오는 폐하에게 두 팔로 크게 X자를 그려 보였다.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승낙의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폐하가 나의 생쇼를 보며 귀엽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무도회 때 보겠네.”
“저는 폐하랑 따로 갈 거예요!”
“내 파트너 자리는 공석일 테니, 언제든지 그대가 차지하게.”

“…….”

폐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시금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무도회는 라일란 폐하가 왕위에 오르고 처음 있는 무도회였다. 이곳에 오는 남자들은 모두 라일란 폐하의 파트너가 되기를 꿈꿨다. 사흘을 내리 이어지는 파티 중 폐하의 옆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 정도. 그 셋 중에서 폐하의 남편이 나올 확률이 가장 높았다.

나는 무도회의 구석에서 남자들의 구애나 구경할 생각이었지만, 황금색의 드레스를 입은 라일란 폐하는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했고 나는 그것을 차마 멀리서만 바라보며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아, 너무 예쁘다. 완벽해. 저게 내 폐하야, 저분이 나의 라일란 폐하라고!

거적때기를 입어도 아름다울 폐하가 황금과 같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드레스는 수많은 금실 무늬에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폐하의 얼굴이 더 빛났다.

나는 결국 폐하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폐하를 둘러싼 무리를 기웃거렸다. 발끝을 든 채 총총거리는 나를 발견한 폐하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냉큼 폐하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좋은 저녁이야, 영희. 나를 위해 이리 아름답게 꾸민 건가?”

폐하는 남자가 했다면 조용히 암살당할 칭찬을 건넸다. 하지만 폐하가 말하자 나는 눈물이 핑 고일 정도로 행복해졌다. 사실 빈둥거리다가 무도회가 시작될 것 같을 때 즈음에야 옷장에 걸려 있던 아무 옷이나 입고 온 것이지만, 폐하를 위해서 입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예뻐요?”
“응, 눈이 부시군.”
“맙소사…… 폐하가 예쁘다고 해 주시니까…… 너무 행복해요…… 눈물 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입고 올걸. 나는 파티에 비해 수수한 내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차원 이동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인이라 옷을 조금 못 입어도 사람들이 신경을 안 썼다.

“울진 말아, 그대는 언제나 행동이 과하군.”
“폐하, 앞에서만 그런 건데…….”

나는 폐하의 곁에 은근슬쩍 달라붙으며 말했다. 아아, 잠시나마 폐하를 독점하는 기분이 너무 달콤했다. 폐하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대는 나의 비가 아닌가.”

나는 이미 나랑 결혼한 것처럼 우기는 폐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른한 미소가 폐하의 입가에 피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줄을 잡았다. 폐하는 너무 과하게 매력적이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청혼을 받아들이고 신혼여행을 갈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릴지도 몰랐다.

“저 이제 갈게요.”
“왜? 옆에 있지. 파트너가 없어 외로운 내 말동무를 해 주는 건 어떤가?”
“……계속 옆에 있으면 저를 폐하의 파트너로 착각할 것 같아서요.”
“내가 그대의 파트너라면, 참으로 영광일 텐데.”

폐하는 내 어깨를 감싼 채 내 머리에 제 고개를 기댔다. 문득 폐하에게서 기분 좋은 자스민 향이 화악 피어올랐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무엄하다는 걸 알면서도 폐하를 손으로 밀어내며 한걸음 물러섰다. 폐하의 태도가 너무 유혹적이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 폐하 미모로 이러지 마세요!”

나는 도망치듯 테라스로 몸을 피했다. 심장이 계속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밤바람의 서늘한 바람이 어느새 붉어진 얼굴을 식혀주었다. 나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폐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엘리엇은 이를테면, 폐하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었다. 나는 차마 그런 최고의 선택지를 가진 폐하를 욕심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오도록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엘리엇보다 잘생기고 매너가 좋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곱씹을수록 분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이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까?내 운명은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심장을 갈라버렸고, 나는 그게 슬프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 인생이 더 쉽고 재밌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그래도 폐하의 운명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이 세상이 준비한 해피엔딩을 만끽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밤바람에 몸이 으슬으슬해져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나는 습관처럼 사람 무리 사이에서 폐하를 찾았다. 폐하 앞에는 눈이 멀 것 같이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가 엘리엇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환상으로 빚은 다비드상. 그는 너무나 완벽해 보였다, 곧게 편 허리와 입가에 있는 잔잔한 미소마저 가끔 너무 활발하다며 혼이 나곤 하는 나와는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

폐하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내가 무심코 지었던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순간 너무나 분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하지 않은 나이기에 폐하는 내 표정을 이미 읽어버렸을 테지만.

잠시 나를 응시하던 폐하가 엘리엇의 팔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전에 없이 은근했다. 그리고 엘리엇을 향해 폐하는- 한없이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이가 다 드러나는 환한 미소는 나도 쉬이 얻어내지 못하는 미소였다.

그러니까, 저게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운명으로 얽히고 행복을 잔뜩 토핑으로 얹을 둘의 사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마음속 깊은 곳이 조금씩 갉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크서클로 얼룩진 눈을 한 채 무도회장에 팔짱을 낀 채로 입장했다. 전날 제대로 잠이 오질 않아 뒤척거리다가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도착한 둘째 날의 무도회였다. 잠을 자지 못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밤 새 전날의 소식을 핏발을 세운 채 듣고 있었다. 폐하는 엘리엇과 대화를 하다가 마음에 든 건지 테라스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는 같이 퇴장했다고 한다. 퇴장 뒤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라일란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는 문지기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흩어져 있던 정신이 폐하의 이름에 바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폐하의 옆에는 엘리엇이 있었다. 폐하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날 일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우리 폐하가 진짜…… 진짜 나 두고 연애하나 봐.”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졌다. 폐하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속이 허전했다. 나는 머리가 참을 수 없이 아파왔다. 머리를 짚은 채 테라스로 나와 정원으로 도망치듯 걸었다. 폐하의 옆에 섰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곳이 조용한 곳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공주님, 나의 황제 폐하, 내게 주어질 그 어떤 미래보다 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 내 심장을 흔들었던 나의 라일란 폐하. 원작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대로 따라가면 내가 수많은 미남들의 사랑을 받고, 황후도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나는 라일란 폐하가 좋았다. 황제가 될 거라는 야망을 품은 그의 오빠와 달리 라일란 공주님은 그의 형제가 자신을 적수로 여길까 두려워하며 제 자신을 숨기고 낮추었다. 그의 오빠가 아름답고 용맹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때 라일란 공주님은 아름답지만 속이 빈 국화라는 평을 받았다.

이 세상의 많은 인간들 중 나만이 라일란 공주님의 평가에 분노했다. 나만이 그의 두려움을 안타까워했다. 내가 그를 부추겼다. 저 왕좌에 앉아서 모두가 두려워 하게 만들어 주세요. 공주님에게 붙여진 수많은 역겨운 별명들을 공주님이 직접 불태워 버려요! 내가 공주님의 기사가 될 테니까.

나는 이고깽(이세계 고등학생 깽판)물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깽판을 칠 만한 무력은 충분히 있었다. 나는 공주님께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은 내 양어깨와 머리 위에 검을 내리며 나를 그의 기사로 임명했다. 나는 내 손으로 공주님의 오빠를 죽였다. 원작에서라면 그는 나를 황후로 만들어줄 메인 남주였다. 미래의 호화로운 황후 자리보다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공주님의 눈빛이 좋았다. 공주님께 왕관을 바친 건 나였다. 그리고 나의 공주님은, 나의 폐하가 되었다.

 

“김영희, ……그대, 울고 있군.”

문득 폐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 다시금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흐어어어엉, 그냥, 너무 기뻐요오, 폐하가 드디어 좋은 남자를 만나서어어엉…….”
“……엘리엇을 말하는 건가.”

“나아는…… 정말로 기뻐요. 흐어엉…….”

폐하가 엉엉 우는 내 곁에 풀썩 앉았다. 나는 열린 댐처럼 줄줄 쏟아지는 말을 어찌할 줄 모르고 흘려보냈다. 내가 폐하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기뻐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아니면 폐하가 엘리엇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확인받고 싶은 건가. 폐하가 줄줄 눈물을 쏟아내는 내게 샴페인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꼴깍 삼키고는 눈가를 닦아냈다. 폐하가 나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엘리엇과 함께 입장한 게 신경 쓰이나?”
“절대! 질투하지 않았어요…….”

나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어 작게 덧붙였다. 아니, 조금……. 폐하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폐하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와 엘리엇이 있는 걸 보고 분한 표정을 짓기에 잠깐 친하게 지낸 것뿐이야. 그대가 질투할까 해서.”
“…….”

“그대가 이렇게 처절하게 울고 있을지는 몰랐어. 사과하겠네.”

“……폐하는 그분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면?”

“흐어엉, 좋은 커프흐어엉…….”
“또 우는군. 농담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영희, 그대야. 내가 왜 엘리엇을 좋아할 거라 생각한 건가.”

나는 내가 놀랄 정도로 다시 눈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폐하가 빠르게 나를 달랬다. 폐하의 질문에 나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엘리엇 씨는 잘생기고 키도 크고 흑, 똥도 안 싸고 방귀도 안 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 영희.”

그 사람은 여자의 환상으로 만들어 낸 다비드상이라고요, 나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난 그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뚱한 내 표정을 본 폐하가 말했다.
“나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아. 영희는 내가 그와 결혼해야 할 이유라도 있다고 생각하나?”
“그분은……, 폐하를 평생이고 사랑할 테니까요. 그런 운명이래요.”

“…….”

페하는 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페하는 이내 낮아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공주였던 시절…… 나는 적어도 나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네. 권력 싸움 사이에서 죽고 싶지 않았던 내게는 그것이 유일한 꿈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그대가 그런 꿈 따위 내 손으로 부수고 더 높은 걸 꿈꾸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 그 말을 했던 그대는 내가 엘리엇이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
“나는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대에게 파트너 신청도 했는데. 그대는 모두 거절해 놓고는 내가 남자와 조금 친해졌다고 여기서 엉엉 우는군.”
“그게…….”

나는 폐하가 완전히 화가 난 표정인 걸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나의 공주님, 나의 라일란 황제 폐하. 내게 유일하게 특별한 사람, 나의 주인, 내가 섬기는 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전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말문을 흐리는 나를 보며 작게 한숨 쉰 폐하가 말했다.

“오늘 무도회에서 나의 파트너가 되고 싶나?”

나는 머뭇거렸다. 폐하가 엘리엇이 싫다고 하면…… 이제 내가 좀 폐하를 독점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 폐하가 나를 좋다고 하는데, 당연히 내가 따라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를 섬기는 기사인걸. 꾹꾹 넣어놨던 마음에 조그만 물꼬가 터지자 말문이 닫히지 않았다. 나는 잔뜩 신이 나서 그에게 말했다.

“저폐하파트너가되고싶어요.폐하랑결혼도하고싶구요,폐하가가는곳마다옆에서붙어다니고싶고,닭살떠는커플도되고싶어요.저폐하랑신혼여행도가고싶고폐하웨딩드레스입은모습보고질질짜고싶어요.저그리고폐하가첩모시면그새끼암살도할래요.”
“……첩을 들일 일은 없지만, 그대가 바라는 일이 뭔지는 기억해두지.”

눈물을 닦아준 폐하가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다정한 손길이 기분 좋았다. 나는 충동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차마 저 신성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나의 입술을 비빌 수는 없었다. 나를 보며 작게 웃음소리를 흘린 폐하가 내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는 눈을 뜨고는 눈앞에 놓인 아름다운 속눈썹과 콧대를 보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폐하가 입술을 떼고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흐어어엉.”
“……왜 또 우나.”

“제가 폐하의 첫 키스를 가져가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흐윽, 저는 지금 너무 기쁘고……읍!”

나불거리는 내 입술에 폐하가 다시 입을 맞췄다. 샴페인 향을 머금은 혀가 입안으로 넘어가서 나는 변태처럼 할딱였다. 입안에 파고든 혀를 잔뜩 빨아당기고 고인 침을 삼켰다. 내가 진짜 폐하랑 키스하고 있는 건가. 코 끝을 스치는 자스민 향에 뇌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폐하의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질척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계속해서 폐하의 안으로 파고들며 고이는 침을 삼켰다. 혓바닥이 얽힐 때마다 혀가 닿은 곳에서 달콤한 맛이 났다. 안달하듯 파고드는 나를 폐하가 귀를 잡아 밀어냈다. 폐하의 볼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폐하가 내게 밀려 반쯤 누워있다는 걸 알고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폐하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에 대한 찬양을 줄줄 늘어놓는 것은 자제하라고.”
“폐하, 폐하가 솜사탕처럼 너무나 달콤해서 정신이 날아갈 것 같…….”
“그러니까, 그런 것들!”

“우.”

“……키스는 나쁘지 않았어.”

그러니 그만 나불거리고, 내게 입 맞춰 봐, 나의 비. 폐하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볼을 붉히며 그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밤의 풀잎 냄새와 섞인 자스민 향이 코끝을 스쳤다.

한윤호님의 후기

무슨 단편을 쓸지 정말 열심히 고민하다가 (평소 제 취향대로 집착피폐물 쓰면 안될 것 같아서) 모두가 즐겁게 보셨으면 싶은 개그-로판 계열로 써 보았습니다. 주접녀X유혹녀의 조합 괜찮으셨나요? 다른 분들의 작품도 정말로 기대됩니다!:) 총괄진님들께도 정말 좋은 합작 열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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